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버티기, 노동현실, 자기존중)
직장에서 버티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약해 보일까 봐 그냥 넘기고 또 넘겼던 때였습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보면서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단순한 직장 드라마가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묻는 작품이었습니다.
버티기와 살아내기는 다릅니다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참자"며 스스로를 설득했던 순간 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업무가 넘쳐나도 당연한 거라 여겼고, 문제를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때는 그게 버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냥 저를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던 겁니다.
영화 속 주인공 박정은도 비슷합니다. 대기업 본사에서 7년을 일했지만 어느 날 창고 구석 책상 하나가 그녀의 자리가 됩니다. 사실상 퇴출 압박(스스로 사표를 쓰도록 유도하는 회사의 전략)이었죠. 그리고 회사는 1년 뒤 복귀 조건을 걸고 그녀를 시골 마을의 하청 업체로 내려보냅니다.
파견 명령(派遣命令)이란 원청 회사가 직원을 계열사나 협력사로 보내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인사 조치입니다. 말이 좋아 파견이지, 이 경우엔 사실상 자진 퇴사를 유도하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정은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짐을 쌉니다. 굴복할 거라면 거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처음에는 저도 정은의 선택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버티냐고요. 그런데 곧 알게 됐습니다. 그녀가 하는 건 버티기가 아니라 살아내기였다는 걸. 그 차이를 이 영화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노동현실, 카메라 앞에서 숨기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고압 송전탑 위에서 일하는 현장직 노동자들의 환경이 영화 안에서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안전모에 테이프를 덧대거나, 제대로 된 작업복 한 벌 없이 철탑을 오르는 장면들이 가볍게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고압 송전탑 작업에서 감전 사고를 막으려면 절연 작업복(絶緣作業服)이 필수입니다. 절연 작업복이란 전기가 신체로 전도되는 것을 차단해주는 특수 소재의 작업복으로, 제대로 된 제품은 100만 원이 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 속 현장 노동자들은 낡은 옷 위에 테이프를 붙이는 수준으로 작업에 나섭니다. 저 같으면 그 상황에서 올라갈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산업재해(産業災害)란 근로자가 업무 수행 중 발생한 사고나 질병으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KOSHA)에 따르면 건설·전기 분야 고위험 작업에서 추락과 감전 사고는 여전히 산업재해 사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영화가 픽션이지만, 이 장면들은 현실에서 그냥 넘어가고 있는 문제들을 그대로 담아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충식이 정은에게 한 말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우리가 무서운 건 해고예요. 해고되면 알바만 해야 되니까." 철탑 위에서 감전이나 추락보다 해고가 더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 이 한 줄이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의 절반쯤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노동현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원청과 하청 사이의 구조적 압박 — 예산 삭감과 인원 감축이 하청 노동자에게 가장 먼저 전가됩니다.
- 안전 장비 부재 — 생명과 직결된 절연 작업복조차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비용으로 남겨집니다.
- 산재 처리 회피 — 사고 발생 후 산재 처리 대신 합의금으로 덮으려는 시도가 반복됩니다.
- 고용 불안 — 해고 위협이 노동자의 발언권을 억누르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작동합니다.
이 네 가지가 영화 한 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낯설지 않다는 게 더 씁쓸했습니다.
자기존중은 스스로 증명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 장면을 꼽겠습니다. 고소공포증이란 높은 장소에 있을 때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증상으로, 일상적인 두려움과는 달리 신체적 반응까지 동반합니다.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이 철탑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힙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공포를 극복하는 건 의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은이 철탑 위로 한 발씩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충식이 건넨 한 가지 질문 덕분이었습니다. "박대리 님은 저 철탑을 누구라고 생각할래요?" 충식은 딸들을 떠올리며 공포를 버텼다고 했습니다. 정은은 잠시 고개를 떨궜다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게 뭘 떠올렸는지는 영화가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 여백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습니다.
노동심리학에서는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자기효능감이란 특정 과제를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하며,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서도 직무 만족도와 지속 근무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됩니다. 정은이 현장에서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이 바로 이 자기효능감을 스스로 쌓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면, 영화의 전체적인 속도는 빠르지 않습니다. 감정 변화가 조용하게 흘러가다 보니,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셨다면 초반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 20여 분은 좀 느리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담담함이 결국 마지막 장면의 무게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게 맞는 영화입니다.
보고 나서 한 가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나의 쓸모를 누가 정의하느냐는 질문입니다. 회사가 정의하든, 현장 동료들이 정의하든, 결국 정은은 그 기준을 스스로 다시 세웁니다. 빠른 결말이나 통쾌한 반전을 기대하셨다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일과 삶에서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돌아보고 싶은 분께는 분명히 남는 영화입니다. 특히 지금 어딘가에서 그냥 버티고 있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youtu.be/FpYqhSkpgS4?si=3lp8RGxR7Y2pNXg6